원성왕릉(괘릉)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785∼798, 김경신(金敬信)
Q .'괘릉' 이름과 관련있는 것은(katamehi ekene)?
1. 물(n. udakena) 2. 불(m. agginā) 3. 바람(m. vātena) 4. 흙(n. bhummena)
삼국사기에 전하는 원성왕의 왕위 계승 정당성 구절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원성왕은 왕위에 오를 때도 물[비(雨)]과 관련있었는데 사후 묻힐 때도 물과 관련있다.
탑의 원류인 산치 투-빠(thūpa)의 양식이 불교를 타고 인도에서 한반도로 전래된 원형이 신라 38대 원성왕릉이다. 그 이전까지 없었든 난간석을 보면 바로 산치 투파가 떠오를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https://bodha.tistory.com/m/181
원성왕릉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를 구분 하는 왕릉으로 삼국시대에는 봉분을 둘러싼 난간돌이 없다.
원성왕릉을 보면 토라나만 없을 뿐 산치 투-빠와 쌍둥이 같다.
난간돌과 둘레돌이 없는 삼국시대 고분군(태종무열왕릉)
난간돌이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통일신라 고분 양식으로 왕릉의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난간돌의 높이가 생각보다 높다. 인도와 달리 또라나가 없어 능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든 폐쇄형 구조를 보인다. 이런 변화는 인도에서 신앙의 대상이던 투빠가 신라로 오면서 왕권강화를 위해 골품제를 만든 것과 함께 왕릉이 권위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난간돌은 양식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양식이다. 이 원성왕릉의 양식과 비슷한 양식의 무덤들 중 김유신의 무덤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김유신 무덤으로 보지 않는 의견이 많다. 동시대인 태종무열왕 무덤은 난간석이 없는 일반 삼국시대 왕릉 양식의 무덤인데 비해 12년 후에 조성된 김유신이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사망 시 태대각간이라는 벼슬을 한 신하인데 무열왕의 권위를 뛰어 넘어 화려한 난간석 형식의 무덤의 양식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 앞의 김유신이라는 비석은 신라시대 조성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만든 것이다.
난간석 안쪽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12지신상이 있다.
왕릉을 잡을 때 기준이 되는 방위는 북쪽으로 쥐 지신상이 시작되며 그 반대쪽인 남쪽에는 제단과 함께 말 지신상이 있다
12지신상 중 말(馬) 지신상은 남쪽을 가르킨다.
원성왕릉하면 뜨오르는 서역인상으로 후대 우리나라 무덤을 지키는 수호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왕릉 입구 오른쪽을 지키고 있는 문신상
재단 앞 면에 문양이 있는데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다. 불족(佛足) 같이도 하고......
원성왕릉을 괘릉이라고 하는 이유는 원성왕을 매장할 때 물이 흘러 널(관, 棺)을 매달(걸다 괘, 掛)았기 때문에 괘릉이라고 한다. 원성왕은 왕위에 오를 때도 물[비(雨)]과 관련있었는데 사후 묻힐 때도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왕릉 왼쪽에는 물길인 수로(水路)가 보이다.
이 수로가 괘릉의 증거이며 이 왕릉이 원성왕의 능임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개방적 자세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국가와 폐쇄적인 자문화중심주의에 빠진 나라들의 운명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1500여 년 전 신라의 문화 수용 자세가 다문화 사회인 오늘날 한국의 문화 배타성에 대해 원성왕릉은 길을 말해 주고 있다.
삼국유사 원성왕편 중
緣會逃名 文殊岾
高僧緣會 嘗隱居靈鷲 每讀蓮經 修普賢觀行 庭池常有蓮數朶 四時不萎今靈鷲寺龍藏殿是緣會舊居 國主元聖王聞其瑞異 欲徵拜爲國師 師聞之 乃棄庵而遁 行跨西嶺嵓間 有一老叟今爾耕 問師奚適 曰 吾聞邦家濫聽 縻我以爵 故避之爾 叟聽曰 於此可賈 何勞遠售 師之謂賣名無厭乎 會謂其慢己 不聽 遂行數里許 溪邊遇一媼 問師何往 答如初 媼曰 前遇人乎 曰 有一老叟侮予之甚 慍且來矣 媼曰 文殊大聖也 夫言之不聽何 會聞卽驚悚 遽還翁所 扣顙陳悔曰 聖者之言 敢不聞命乎 今且還矣 溪邊媼彼何人斯 叟曰 辯才天女也 言訖遂隱 乃還庵中 俄有天使賫詔徵之 會知業已當受 乃應詔赴闕 封爲國師僧傳云憲安王封爲二朝王師 号照咸通四年卒 與元聖年代相左 未知孰是 師之感老叟處 因名文殊岾 見女處曰阿尼岾 讚曰 倚市難藏久陸況 囊錐旣露括難禁 自緣庭下靑蓮誤 不是雲山固未深
연회가 명예를 피해 달아나다가 문수점에서 도를 얻다
고명한 연회스님은 일찌기 영취산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法華經을 읽고 보현관행을 공부하였다. 뜰의 못에는 언제나 연꽃 여러 송이가 일년내내 시들지 않았다. 지금의 영취사 용장전이 바로 연회가 옛날에 살던 곳이다. 원성왕이 그 상서로운 이적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로 삼으려 했더니 스님이 이 말을 듣고 그만 암자를 버리고 달아났다. 서쪽 고개 바위 틈을 넘어가니 한 노인이 방금 밭을 갈다가 스님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알고 벼슬로써 나를 구속하려 하므로 이 곳을 피하는 길이요”하니 늙은이가 듣고 말하기를 “여기서 팔 일이지 수고스럽게 멀리 가서 팔 것 있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팔기를 몹시 좋아 하는구료!”하니 연회가 자기를 조롱하는 줄로만 여기고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몇 리를 더 가다가 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스님은 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므로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앞서 누구를 만났습니까?”하였다. 그는 대답하여 “한 노인이 있었는데 나를 매우 모욕하므로 기분이 불쾌해져서 그냥 지나쳐 왔소.”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그분이 문수대성인데 그분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어쩌겠습니까?”하였다. 연회가 놀랍고 송구스러워 노인이 있던 곳으로 급히 가서 이마를 조아리고 후회하여 발명하기를 “보살님의 말씀을 감히 어찌 거역하요리까! 지금 되 돌아 왔지마는 냇가에 노파는 그 누구신지요?”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변재천녀이다”하고 말을 마치자 그만 사라졌다. 연회가 도로 암자로 돌아 왔더니 조금 뒤에 칙사가 조서를 받들고 와서 불렀다. 연회가 꼭 받아야 될 것임을 알고 곧 조서에 응하여 대궐로 가니 국사로 봉하였다.(승전에 이르기를 헌안왕이 봉하여 두 왕대의 왕사로 삼고 호를 照라하였으니 함통4년에 죽었다 하였는바 원성왕의 년대와 서로 틀리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음.)연회스님이 노인에게 감응하던 곳을 문수점이라 이름짓고 여인을 만난 곳을 아니점이라 불렀다.
讚하노니
번화한 곳 가까우면 오래 묻혀 못 있을 것
이름 한 번 들쳐나매 수습하기 어려워라
내가 사는 이 산이 얕다고 말을 말라
뜰 아래 연꽃 피니 그 탓인가 하노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新羅本紀第十.
<元聖王>․<昭聖王>․<哀莊王>․<憲德王>․<興德王>․<僖康王>․<閔哀王{敏哀王}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 <朴>氏<繼烏>夫人; 妃, <金>氏, <神述>角干之女. 初, <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洎<宣德>卽位, 邦{卽}爲上大等.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二月, 追封高祖大阿湌<法宣>爲<玄聖大王>, 曾祖伊湌<義寬>爲<神英大王>, 祖伊湌<魏文>爲<興平大王>, 考一吉湌<孝讓>爲<明德大王>, 母<朴>氏爲<昭文太后>, 立子<仁謙>, 爲王太子. 毁<聖德大王>․<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德大王>爲五廟. 增文武百官爵一級. 拜伊湌兵部令<忠廉>爲上大等. 伊湌<悌恭>爲侍中, <悌恭>免, 伊湌<世强>爲侍中. 三月, 出前妃<具足王后>於外宮, 賜租三萬四千石. <浿江鎭>進赤烏. 改摠管爲都督.
李丙燾.
「북한본」.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이 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 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현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조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묘당을 헐고, 시조대왕과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 흥평대왕과 부 명덕대왕을 5묘로 정하였다.
문무 백관에게 작위를 한 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가, 제공이 퇴직하자,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3월, 전 왕비 구족왕후를 외궁으로 내보내고, 벼 3만 4천 석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을 고쳐 도독이라 하였다.
경주를 흐르는 강 중 북쪽에 있는 강으로 북천(北川)이라고 하는 알천(閼川, 閼 가로막을 알)
※ 비 때문에 좌절된 왕권
주원의 아들과 손자의 3대에 걸친 복수 : 헌덕왕 14년(822년) 아버지 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며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한 때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신라의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을 장악하였으나 신라의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헌장 군을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으나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패할 것을 짐작한 헌창은 자결하고 자결한 헌창의 시신은 부하가 머리를 짤라 각각 따로 묻었지만 성이 함락되자 관군은 헌창의 친족과 그를 따를는 부하 등 239명을 죽이고 헌창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를 한다. 김헌창이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조선처럼 중국의 신하 국가이거나 중국의 영향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주체적인 국가라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헌장의 난 3년 뒤인 825년(헌덕왕 17년) 살아 남은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다시 고달산의 산적 수신(壽神)등 100여명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아버지 헌창과 달리 권력과 군사들이 턱없이 부족하니 쉽게 제압당하게 된다. 부족한 군사로 반란이 가능하리라 여겼다면 현실을 올바로 판단 못한 것이며 복수는 복수가 목적이고 성공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도독 총명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처형당함으로써 3대에 걸친 성공하지 못한 원한과 복수는 끝이 난다. 왕위에 오를지 못한 것을 억울해 했을 김주원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한을 계속 이야기 했을 것이며 그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위한 노력은 아들에게로 다시 손자에게로 전해져 난이 일어난 것을 보면 빼앗긴 왕권을 다시 찾겠다는 집념들이 얼마나 강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과 복수의 한(恨)은 끝이 없는 듯하다. 김헌창의 난은 내물왕의 12세손인 김경신(원성왕)과 태종무열왕 6세손인 김주원 사이에 있었던 왕위계승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즉 내물왕계와 태종무열왕계 사이에 벌어진 왕위계승 싸움이였다.
태종무열왕의 후손이었던 김헌창은 시중을 역임하기도 하며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점차 지방관으로 내몰리면서 중앙에서 멀어져갔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822년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구실로 웅주(熊州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한 달만에 진압당했다. 김헌창의 아버지 이찬 김주원(金周元)은 원래 태종무열왕의 6세손으로서 37대 선덕왕이 사망한 이후 왕위계승 후보 1순위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 상황 변동으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김경신(金敬信)이 즉위하여 원성왕이 되었다. 이에 김주원은 명주(溟州 : 강원도 강릉시)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한 김헌창은 애장왕대인 807년 시중으로 임명되었다가 물러났다. 헌덕왕대인 813년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이 되었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814년 시중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퇴임하였다. 하지만 이후 816년 청주도독(菁州都督)이 되었고, 821년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되는 등 주로 외직으로 나가면서 인사상 홀대를 받았다. 외직을 도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였고, 결국 822년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憲德王>
○十四年, 春正月, 以母弟<秀宗>爲副君, 入<月池宮>.[<秀宗>或云<秀升>.] 二月, 雪五尺. 樹木枯.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歃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湌<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卽授<崔雄>位級湌, <速含郡>大守{太守}, <令忠>位級湌, 遂差員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湌<張雄>先發, 迊湌<衛恭>․波珍湌<悌陵>繼之, 伊湌<均貞>․迊湌<雄元>․大阿湌<祐徵>等, 掌三軍徂征. 角干<忠恭>․迊湌<允膺>, 守<蚊火>關門. <明基>․<安樂>二郞, 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黃山>, <安樂>赴<施彌知鎭>.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黃山}>,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陷, <憲昌>知不免, 自死. 從者斷首與身, 各藏. 及城陷, 得其身於古塚, 誅之, 戮宗族黨與凡二百三十九人, 縱其民. 後, 論功爵賞有差. 阿湌<祿眞>授位大阿湌, 辭不受. 以<歃良州><屈自郡>近賊, 不汙於亂, 復七年. 先是, <菁州>太守廳事南, 池中有異鳥, 身長五尺, 色黑, 頭如五歲許兒, 喙長一尺五寸, 目如人, 嗉如受五升許器, 三日而死, <憲昌>敗望兆也. 聘角干<忠恭>之女<貞嬌>, 爲太子妃. <浿江>山谷間, 顚木生蘖, 一夜高十三尺, 圍四尺七寸. 夏四月十三日, 月色如血. 秋七月十二日, 日有黑暈, 指南北. 冬十二月, 遣<柱弼>入<唐>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수종을 수승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 18일, 완산주 장사 최 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주해와서 변고를 알렸다. 왕은 곧 최 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8명을 파견하여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 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 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다. 성이 점령되자 그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하였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지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그 키는 다섯 자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은 닷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았다.
패강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그 싹은 하룻밤에 높이가 열 세 자, 둘레가 넉 자 일곱 치나 자랐다.
여름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가을 7월 12일,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겨울 12월,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손자 법문의 반란
○十七年, 春正月, <憲昌>子<梵文>, 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北漢山城}>. 都督<聰明>率兵, 捕殺之.[<平壤>, 今<楊州>也, <太祖>製<庄義寺>齋文, 有<高麗>舊壤, <平壤>名山之句.] 三月, <武珍州><馬彌知縣>女人産兒, 二頭二身四臂, 産時天大雷. 夏五月, 遣王子<金昕>, 入<唐>朝貢, 遂奏言: “先在大學生, <崔利貞>․<金叔貞>․<朴季業>等, 請放還蕃, 其新赴朝<金允夫>․<金立之>․<朴亮之>等一十二人, 請留宿衛. 仍請配國子監習業, 鴻臚寺給資粮.” 從之. 秋, <歃良州>獻白烏{白馬}. <牛頭州><大楊管郡><黃知>奈麻妻, 一産二男二女, 賜租一百石.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산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평양은 지금의 양주인데, 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 명산’이라는 글귀가 있다.]
3월,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름 5월, 왕자 김 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 이정․김 숙정․박 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 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 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 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주전부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롱 우승가자 (0) | 2023.02.21 |
---|---|
한국 당구는 이리 창의적이다 (0) | 2023.02.20 |
원성왕릉 12지신상 (0) | 2023.02.17 |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하는 여행 (1) | 2023.02.16 |
"aññāsi koṇḍañña"(꼰단냐는 알았다!) (0) | 2023.02.12 |